인터뷰 ≪처음 만개하다≫ 가수 최백호

MyHero최백호

80년대에 태어난 저는 대학시절, 축제 때는 학우들의 어깨를 감싸쥐고 ‘영일만 친구’를 불러버렸습니다.

가끔 얼근히 취해서 집에 돌아오는 아버지가 ‘낭만에 대해서’를 흥얼거리는 걸 들었어요. 실제로 노래하는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그냥 그렇게 선생님은 제 마음에 ‘청춘’이자 ‘낭만’으로 자리매김하셨습니다.

노래 한 곡의 생명이 한 달도 안 돼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가, 편지 대신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요즘, 저는 “왜 이렇게 낭만이 없지?”라는 말을 밥처럼 쏟아내며 묘하게 가을을 탔습니다.

조금의 반짝임만 쫓는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더해져 점점 더 그 빛을 발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거든요. 선생님이 태어나신 해인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반세기가 지나도 12년이 더 지난 지금, 12년만에 발표한 당신의 앨범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 그 잃어버린 로망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ER 정윤기

감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성인이요’ 카테고리로 구분되는 선생님의 앨범이었습니다.

첫 트랙이 시작되는 순간 머리를 한 방 세게 친 느낌이었어요. 박주원의 기타 반주와 당신의 목소리만으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그 열정이 이제 막 음악을 시작한 청년 같았어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통 재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뻥튀기’ 넘치는 트로트도 아니었습니다.

그 목소리와 창법, 느낌과 아우라는 오직 당신만의 것이었습니다.

76년 본인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달려라는 곡의 리메이크였다고 합니다.

앨범 11곡을 단숨에 흘려버렸어요. 젊은 후배 뮤지션(박주원, 말로, 민경인, 조윤성, 라새 앨범 나오고 요즘 인터뷰 많이 하죠? 네, 많이 해요.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신인 때 첫 앨범 나왔을 때 조금 했지.

그때 소속사 이름이 ‘소라벌 레코드’였죠?와 어떻게 알았어!

선생님 뒷조사 많이 했어요. 요즘 인터넷에 나와있는건 엉터리에요. 왜 이렇게 해놨냐고 물었더니 귀찮아서 안 했어요

수정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본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 버리거든요.저는 인터넷이나 SNS 같은 건 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어느 정도 숨어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그게 다 없어졌어. 사람에 대한 신비감이 없어요. 영웅이 없어요 영웅이가. ‘영웅’이. ‘전설’이 없어졌어요.

SNS만 보면 세상에 외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사람 관계라는 건 이렇게 마주보고 얘기해야 되는 거예요. 서로 닿아야 합니다.

SNS 같은 걸로 사람들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고립되는 거예요. 저희가 어렸을 때 컴퓨터라는 게 없었을 때 ‘언젠가 인간이 기계에 망하겠지’라는 SF영화나 만화, 소설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 그렇게 됐잖아요. 기계가 길을 찾다가 오류라도 나면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게 되고.

어렸을 때 만화를 많이 본 것 같네요.그럼요. 국민학교 때 만화 보고 따라 그려서 그림을 하게 됐으니까. 지금도 홍대 앞에 있는 ‘북적북적’일까? 거기서 만화책을 많이 삽니다.

어렸을 때 <라이파이>라는 엄청난 SF만화가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두 부류로 나뉜다.

‘라이파이’ 본 사람과 안 보는 사람 이것을 본 사람은 좋은 놈, 이것을 모르는 놈들은 상대해서는 안 된다.

공부밖에 안하던 놈들이야.

인생의 풍류를 모르는 사람들이에요?그렇죠. 모르는 게 아니라 피해 온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은 <라이파이>를 본 사람들에 속하네요.저는 라이파이에 빠진 사람… (핸드폰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제가 그린 라이파인데… 팬클럽에도 제가 들어있어요. 거기에 가면 ‘라이파이’가 착용되어 있는 가면과 두건을 줍니다.

벤더, 정재덕 등)의 연주만 보면 잘 만들어진 재즈 앨범 정도라고 생각했을 텐데 당신의 목소리에 따라 음악의 질감이 특별히 달라졌음을 느꼈어요. 용기를 내주시고 이런 앨범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처음 뵙자마자 심상치 않은 패션 감각을 깨달았어요. 우리 잡지에 나온 곽민석을 보고 누구최백호가 그린 라이파이

팬클럽 회원들이 이거 쓰고 만나는 거예요?다 쓰지 않고 가끔 써오는 사람이 있어요. 저도 썼고… 라이파이 요새가 태백산에 있어요. 삐삐가 오면 비행기를 타고 라이파이가 나타나는데 비행기 이름이 ‘제비호’야. 비행기를 운전하는 여자 파트너 이름이 ‘제비짱’이야.

‘007’이랑 ‘본드걸’처럼요?닮았어요. 제비가 비행기를 운전하고 라이파이는 줄을 타고 내려와 악당을 무찌르곤 했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저는 그때 이게 상상의 만화가 아니라 라이파이가 틀림없이 태백산에 있는 줄 알았어요. 근데 정말 재밌는 게… 우리 딸이 어렸을 때 무슨 만화를 보고 학교에서 로봇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그게 실제로 있다고 우기는 거야. 그걸 보면서 제 옛날 생각이 나서 얼마나 웃었는지… ‘라이파이’ 연재가 끝나고 나서는 박기정 선생님의 ‘도전자’라는 만화를 봤어요. 여기 팬클럽에도 제가 가입했어요. 가면 얘들아~ 내 또래야. 대학교수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화 주인공 얘기를 하곤 해요.

미국인들이 <스타워즈> 분장하고 모여서 노는 것처럼요?맞아요. 사실 그게 필요해요. 한국 사회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중년이 되면 그런 감성을 잃잖아. 그거 아껴야지 잃어버리면 안 돼요. 나이가 들어서도 만화를 봐야 해요.

삶의 기복에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은 태어나신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3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고 하셨어요.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 했지만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 생활고로 차라리 군 입대를 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결핵을 앓아 1년 만에 의병 제대를 했습니다.

가난으로 고생하다가 70년대 당시 불었던 기타 열풍으로 곳곳에 라이브 가게가 생기자 어느새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일주일 만에 다른 대형점으로 스카우트하셨고, 바로 부산시내 여러 가게에서 ‘스타’가 되었습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그때부터 느꼈다고 들었어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발표한 앨범에 ‘내 마음의 갈 곳을 잃고’와 ‘달려라’가 들어있습니다.

작곡가들로부터 많은 곡을 받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때 감정이 나빠진 작곡가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남의 곡을 잘 안 받는다, 제 곡은 제가 쓴다고 했어요. 작곡가가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는 사람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그의 곡을 불러야 가사를 끊어 중간을 드러내야 심의가 통과하는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그 무렵 울며 겨자먹기로 앨범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엉터리였고 개운치 않은 미완의 노래 ‘입영전야’를 선생님은 작년에 다시 불러 발표하셨습니다.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춘 곡입니다.

77년 입영전야가 2011년 다시 태어나기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멋진 반백 신사가 되었습니다.

앨범 내기 전에 노래나 음악을 배운 적은 없었잖아요?그럼요. 그냥 앨범 하나 낸다는 것 자체가 흥분돼서 매 순간 긴장되고 좋았어요. ‘노래를 어떡해’가 아니라 스튜디오 안에서 즉흥적인 느낌으로 불렀어요. 지금도 저는 노래를 매번 똑같이 부르지 못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개성이 없어요. 저희 세대는 직접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게 전부고 선생님도 없었고 배운 적도 없었잖아요. 그런 점이 더 다양한 개성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저희 때 좋은 가수들이 많이 나왔어요. 조용필 나훈 송창식 요즘은 노래도 목소리도 노래도 다 비슷해요. 노래는 대학에서 배우면 안됩니다.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선생님 냄새가 나거든. 가수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색깔을 내야 합니다.

데뷔 앨범이 대박을 터뜨렸어요.그해에만 8만장 팔렸으니까. 전축이 있는 집도 별로 없던 시절인데 8만 장이면 어마어마했어요. 섭외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전화 한 대를 따로 만들어 줄 정도였다.

제가 있던 레코드 회사에 나중에 정태춘이 들어오고 산울림도 들어오고. 그런데도 돈은 하나도 못 받았어요. 그것 때문에 하숙비가 3~4개월치를 밀렸어요. 그러다가 나는… 돈을 많이 주는 음반사에 갔다.

지금으로 치면 1억원 정도의 돈을 받은 것 같다.

돈이 하나도 없다.

1억이 생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은행에 계좌를 개설해서 저축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저는. 세상 사정을 잘 몰랐어요. 그때 그 돈을 하숙집 이불 밑에 넣어놓고 조금씩 꺼내 썼습니다.

가요계 분위기도 지금은 많이 달랐을 거예요.선후배 관계가 확실했어요. 같이 만날 시간도 많았고 지금은 그런 게 다 없어졌어 사실 그 책임의 절반은 방송국에 있어요. 일본에서는 신인이 나와서 아무리 빅히트를 해도 신인은 신인입니다.

방송국 연말 가요제에 아무리 톱스타라고 해도 신인이 가장 먼저 나오고 연륜이 있는 중견 가수들이 가장 뒤에 나옵니다.

가수왕은 1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할 사람을 줘야 한다.

시커먼 신인을 자신들의 방송국 가요제에 나갔다고 시청률을 올리면 상을 주면 체계가 꼬입니다.

요즘은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거의 없죠?작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이적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알리랑 공연한 적도 있고. 공연 끝나고 뒤풀이하면서 많이 친해졌어요. 요즘은 보기 드문 기회네. 방송국이나 공연기획사가 중견가수를 대우해주면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선배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방송사가 대우를 해주지 않으니 후배들도 가볍게 알고 있다.

이 사회 자체가 어른에 대한 대우가 없어요. 전설, 영웅이 없는 사회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잘해야지. 앨범을 꾸준히 내고 앨범도 많이 팔리고 콘서트도 하고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배들도 선배를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젊은 친구들은 오히려 보고 따를 수 있는 말 그대로 ‘아이돌’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하거든요.그렇죠. 그런 활동을 보여주는 선배들이 많지 않아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 송창식 선배인데,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형이 자꾸 앨범도 내고 활동도 해야 된다고

그래도 선생님은 7, 80년대부터 쌓아온 명성이 있었잖아요.그런 거 필요없어요 요즘은. 경력이나 연륜에 대한 인정이나 존중 없는 사회니까. 대부분의 중견 가수들이 포기해요.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은 매일 술이라도 마셔요. 밤에 라이브 클럽에서 불러.

선생님도 80년대 말까지 1, 2년에 한 번은 앨범을 냈어요. 그리고 공백이 있었어요.계속 음악을 했는데 ‘영일이만 친구’ 이후로 앨범이 하나도 안 됐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이민도 갔고, 부산에 가서 약 2년을 보내고. 음악을 거의 포기했습니다.

가수들은 인기가 떨어지면 거기서 발생하는 현상이 주는 인간적인 모멸감이 상당합니다.

클럽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 100만원을 받는데 어느 날 갑자기 50만원만 받으라는 거야. 그만두라는 것도 아니고.얼마나 기분이 안 좋으세요? 자존심도 상하고. 방송도 계속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점점 전화가 줄어서 일이 끊겨요. 그럴 때 세상에서 느껴지는 소외감 따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인기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죠. 아주 큰 힘이 절벽 위에서 멱살을 잡고 있는 확 풀어버리는 느낌이야. 정말 비참해요.

낭만에 대하여

LA 한인방송국이 생겨 DJ 자리를 약속받고 출발한 이민의 길이었어요. 그나마 2년 만에 문을 닫고 가족을 미국에 남겨두고 혼자 한국에 돌아와 하루 7곳의 밤 무대를 돌며 노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가수들이 부르고 마이크를 관객들에게 돌리는 게 싫어서 그렇다고 네 군데 가게를 돌면 그다음부터는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너무 싫었다고. 그렇게 1년 동안 달리고 가족을 다시 껴안았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던 마음은 가수였을까요, 가장이었을까요. 음반사 계약금이 1억이나 된 인기 최고 20대 청년이 40대 중반에야 쓴 노래가 바로 ‘낭만에 대하여’였습니다.

한낮에 집 거실에 앉아 설거지하는 아내를 보며 읊은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서 나처럼 늙어갈까’로 시작된 노래였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현실이 힘들수록 선생님도 잃어버린 로망을 찾고 싶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그 노래를 쓸 때쯤 저희 아버지도 그랬을까요? 지금은 불후의 명곡이라 불리는 ‘낭만에 대하여’는 발표 후 1년 반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수만 장씩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목욕탕 남자들>에 나온 날부터였습니다.

그렇게 팔린 앨범이 35만장이었대요. 당신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처럼 삶이란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더라도 모든 우연과 기적이 이어진 순간의 합계라고.

낭만에 대하여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나요?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저에게 그런 노래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음악생활뿐만 아니라 내 삶 자체가 바뀐 겁니다.

그 노래를 위해 지금까지 라디오(<최백호의 로망시대>) DJ도 하고 있고 17년째 잘 살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목소리는 어때요?신인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전보다 지금 노래를 더 잘해요. 옛날에는 노래를 정말 못 불렀어요. 노래 맛을 몰랐다고 할까요? 자신감도 없었고 건강도 별로였고. 10년 전부터 채식주의자 중심으로 식생활도 바꾸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나이가 들면 목소리든 노래든 당연히 더 나빠진다고 생각해요.저는 노래실력도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고 더 좋은 노래를 쓸 것입니다.

40대 중반에야 낭만에 대하여를 썼는데 70세가 되면 더 멋진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사실입니다.

더 멋진 가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을 더 겪으면서 세상이 좀 보일 거야.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틀림없이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런 기대와 자신감이 있어요, 정말.

그림도 그리고 있잖아요 얼마 전에 개인전도 치렀어요. 음악과 그림의 표현방법에 차이가 있을까요?미술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생각을 얻어가는 거예요. 하지만 음악은 하나의 언어입니다.

대화의 방법입니다.

혼자 떠드는 일방적인 얘기가 아니라.

선생님은 음악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냐고 묻기도 하고 그의 신발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테이블 밑으로 갑자기 발을 올려놓고 “한국에는 멋진 게 없고 이 신발도 일본에서 사온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당황스러웠습최백호가 그린 라이파이

팬클럽 회원들이 이거 쓰고 만나는 거예요?다 쓰지 않고 가끔 써오는 사람이 있어요. 저도 썼고… 라이파이 요새가 태백산에 있어요. 삐삐가 오면 비행기를 타고 라이파이가 나타나는데 비행기 이름이 ‘제비호’야. 비행기를 운전하는 여자 파트너 이름이 ‘제비짱’이야.

‘007’이랑 ‘본드걸’처럼요?닮았어요. 제비가 비행기를 운전하고 라이파이는 줄을 타고 내려와 악당을 무찌르곤 했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저는 그때 이게 상상의 만화가 아니라 라이파이가 틀림없이 태백산에 있는 줄 알았어요. 근데 정말 재밌는 게… 우리 딸이 어렸을 때 무슨 만화를 보고 학교에서 로봇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그게 실제로 있다고 우기는 거야. 그걸 보면서 제 옛날 생각이 나서 얼마나 웃었는지… ‘라이파이’ 연재가 끝나고 나서는 박기정 선생님의 ‘도전자’라는 만화를 봤어요. 여기 팬클럽에도 제가 가입했어요. 가면 얘들아~ 내 또래야. 대학교수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화 주인공 얘기를 하곤 해요.

미국인들이 <스타워즈> 분장하고 모여서 노는 것처럼요?맞아요. 사실 그게 필요해요. 한국 사회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중년이 되면 그런 감성을 잃잖아. 그거 아껴야지 잃어버리면 안 돼요. 나이가 들어서도 만화를 봐야 해요.

삶의 기복에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은 태어나신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3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고 하셨어요.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 했지만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 생활고로 차라리 군 입대를 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결핵을 앓아 1년 만에 의병 제대를 했습니다.

가난으로 고생하다가 70년대 당시 불었던 기타 열풍으로 곳곳에 라이브 가게가 생기자 어느새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일주일 만에 다른 대형점으로 스카우트하셨고, 바로 부산시내 여러 가게에서 ‘스타’가 되었습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그때부터 느꼈다고 들었어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발표한 앨범에 ‘내 마음의 갈 곳을 잃고’와 ‘달려라’가 들어있습니다.

작곡가들로부터 많은 곡을 받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때 감정이 나빠진 작곡가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남의 곡을 잘 안 받는다, 제 곡은 제가 쓴다고 했어요. 작곡가가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는 사람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그의 곡을 불러야 가사를 끊어 중간을 드러내야 심의가 통과하는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그 무렵 울며 겨자먹기로 앨범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엉터리였고 개운치 않은 미완의 노래 ‘입영전야’를 선생님은 작년에 다시 불러 발표하셨습니다.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춘 곡입니다.

77년 입영전야가 2011년 다시 태어나기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멋진 반백 신사가 되었습니다.

앨범 내기 전에 노래나 음악을 배운 적은 없었잖아요?그럼요. 그냥 앨범 하나 낸다는 것 자체가 흥분돼서 매 순간 긴장되고 좋았어요. ‘노래를 어떡해’가 아니라 스튜디오 안에서 즉흥적인 느낌으로 불렀어요. 지금도 저는 노래를 매번 똑같이 부르지 못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개성이 없어요. 저희 세대는 직접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게 전부고 선생님도 없었고 배운 적도 없었잖아요. 그런 점이 더 다양한 개성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저희 때 좋은 가수들이 많이 나왔어요. 조용필 나훈 송창식 요즘은 노래도 목소리도 노래도 다 비슷해요. 노래는 대학에서 배우면 안됩니다.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선생님 냄새가 나거든. 가수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색깔을 내야 합니다.

데뷔 앨범이 대박을 터뜨렸어요.그해에만 8만장 팔렸으니까. 전축이 있는 집도 별로 없던 시절인데 8만 장이면 어마어마했어요. 섭외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전화 한 대를 따로 만들어 줄 정도였다.

제가 있던 레코드 회사에 나중에 정태춘이 들어오고 산울림도 들어오고. 그런데도 돈은 하나도 못 받았어요. 그것 때문에 하숙비가 3~4개월치를 밀렸어요. 그러다가 나는… 돈을 많이 주는 음반사에 갔다.

지금으로 치면 1억원 정도의 돈을 받은 것 같다.

돈이 하나도 없다.

1억이 생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은행에 계좌를 개설해서 저축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저는. 세상 사정을 잘 몰랐어요. 그때 그 돈을 하숙집 이불 밑에 넣어놓고 조금씩 꺼내 썼습니다.

가요계 분위기도 지금은 많이 달랐을 거예요.선후배 관계가 확실했어요. 같이 만날 시간도 많았고 지금은 그런 게 다 없어졌어 사실 그 책임의 절반은 방송국에 있어요. 일본에서는 신인이 나와서 아무리 빅히트를 해도 신인은 신인입니다.

방송국 연말 가요제에 아무리 톱스타라고 해도 신인이 가장 먼저 나오고 연륜이 있는 중견 가수들이 가장 뒤에 나옵니다.

가수왕은 1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할 사람을 줘야 한다.

시커먼 신인을 자신들의 방송국 가요제에 나갔다고 시청률을 올리면 상을 주면 체계가 꼬입니다.

요즘은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거의 없죠?작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이적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알리랑 공연한 적도 있고. 공연 끝나고 뒤풀이하면서 많이 친해졌어요. 요즘은 보기 드문 기회네. 방송국이나 공연기획사가 중견가수를 대우해주면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선배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방송사가 대우를 해주지 않으니 후배들도 가볍게 알고 있다.

이 사회 자체가 어른에 대한 대우가 없어요. 전설, 영웅이 없는 사회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잘해야지. 앨범을 꾸준히 내고 앨범도 많이 팔리고 콘서트도 하고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배들도 선배를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젊은 친구들은 오히려 보고 따를 수 있는 말 그대로 ‘아이돌’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하거든요.그렇죠. 그런 활동을 보여주는 선배들이 많지 않아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 송창식 선배인데,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형이 자꾸 앨범도 내고 활동도 해야 된다고

그래도 선생님은 7, 80년대부터 쌓아온 명성이 있었잖아요.그런 거 필요없어요 요즘은. 경력이나 연륜에 대한 인정이나 존중 없는 사회니까. 대부분의 중견 가수들이 포기해요.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은 매일 술이라도 마셔요. 밤에 라이브 클럽에서 불러.

선생님도 80년대 말까지 1, 2년에 한 번은 앨범을 냈어요. 그리고 공백이 있었어요.계속 음악을 했는데 ‘영일이만 친구’ 이후로 앨범이 하나도 안 됐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이민도 갔고, 부산에 가서 약 2년을 보내고. 음악을 거의 포기했습니다.

가수들은 인기가 떨어지면 거기서 발생하는 현상이 주는 인간적인 모멸감이 상당합니다.

클럽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 100만원을 받는데 어느 날 갑자기 50만원만 받으라는 거야. 그만두라는 것도 아니고.얼마나 기분이 안 좋으세요? 자존심도 상하고. 방송도 계속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점점 전화가 줄어서 일이 끊겨요. 그럴 때 세상에서 느껴지는 소외감 따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인기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죠. 아주 큰 힘이 절벽 위에서 멱살을 잡고 있는 확 풀어버리는 느낌이야. 정말 비참해요.

낭만에 대하여

LA 한인방송국이 생겨 DJ 자리를 약속받고 출발한 이민의 길이었어요. 그나마 2년 만에 문을 닫고 가족을 미국에 남겨두고 혼자 한국에 돌아와 하루 7곳의 밤 무대를 돌며 노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가수들이 부르고 마이크를 관객들에게 돌리는 게 싫어서 그렇다고 네 군데 가게를 돌면 그다음부터는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너무 싫었다고. 그렇게 1년 동안 달리고 가족을 다시 껴안았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던 마음은 가수였을까요, 가장이었을까요. 음반사 계약금이 1억이나 된 인기 최고 20대 청년이 40대 중반에야 쓴 노래가 바로 ‘낭만에 대하여’였습니다.

한낮에 집 거실에 앉아 설거지하는 아내를 보며 읊은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서 나처럼 늙어갈까’로 시작된 노래였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현실이 힘들수록 선생님도 잃어버린 로망을 찾고 싶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그 노래를 쓸 때쯤 저희 아버지도 그랬을까요? 지금은 불후의 명곡이라 불리는 ‘낭만에 대하여’는 발표 후 1년 반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수만 장씩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목욕탕 남자들>에 나온 날부터였습니다.

그렇게 팔린 앨범이 35만장이었대요. 당신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처럼 삶이란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더라도 모든 우연과 기적이 이어진 순간의 합계라고.

낭만에 대하여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나요?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저에게 그런 노래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음악생활뿐만 아니라 내 삶 자체가 바뀐 겁니다.

그 노래를 위해 지금까지 라디오(<최백호의 로망시대>) DJ도 하고 있고 17년째 잘 살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목소리는 어때요?신인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전보다 지금 노래를 더 잘해요. 옛날에는 노래를 정말 못 불렀어요. 노래 맛을 몰랐다고 할까요? 자신감도 없었고 건강도 별로였고. 10년 전부터 채식주의자 중심으로 식생활도 바꾸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나이가 들면 목소리든 노래든 당연히 더 나빠진다고 생각해요.저는 노래실력도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고 더 좋은 노래를 쓸 것입니다.

40대 중반에야 낭만에 대하여를 썼는데 70세가 되면 더 멋진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사실입니다.

더 멋진 가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을 더 겪으면서 세상이 좀 보일 거야.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틀림없이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런 기대와 자신감이 있어요, 정말.

그림도 그리고 있잖아요 얼마 전에 개인전도 치렀어요. 음악과 그림의 표현방법에 차이가 있을까요?미술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생각을 얻어가는 거예요. 하지만 음악은 하나의 언어입니다.

대화의 방법입니다.

혼자 떠드는 일방적인 얘기가 아니라.

선생님은 음악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니다.

한국에도 멋진 스트리트 브랜드가 많기 때문에 앞으로 많이인터뷰를 마치고 EBS <스페이스 공감> 녹화 공연장으로 선생님을 따라갔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CD와 유튜브 영상으로만 보고 기사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관중석에는 나란히 손을 잡고 온 어머니와 딸도 보였고, 아담하게 팔짱을 낀 중년 부부도 보였습니다.

선생님의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즈곡으로 리메이크한 ‘보고 싶은 얼굴’을 부를 때, ‘허’, ‘팬-‘, ‘한-‘이라는 음절을 목소리로 내뱉을 때 그때 제 마음이 확 내려앉았습니다.

그 소절만으로 노래는 기술로 부르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꼈습니다.

억지로 따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큼의 시간과 삶이 쌓이면 가능한 표현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큰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에게 90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관객 박수와 무대의 소중함이 얼마나 절실할까요. “존경하고 좋아하는 뮤지션”이라고 직접 소개한 말과 “아들이 될 뮤지션”이라고 소개한 박주원과 같은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나요. 집시 기타와 콘트라베이스로만 편곡해 넉넉히 비워둔 여백을 선생님의 목소리로만 채운 ‘낭만에 대하여’를 듣고 결국 울어버리면 제가 난리를 치는 걸까요. 선생님의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길, 제가 찾으려 했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해야 하는데 저도 선생님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존중해야 한다는 걸.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 천천히 빛을 내기 시작한다는 걸. 선생님,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낭만에 대하여’라는 멋진 애창곡을 갖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희 아버지께서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노래, 술 한잔 하실 때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 많이 만들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살아 있는 전설이자 영웅입니다.

F. OUND magazine 28번째 책, December, 2012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 있습니다.

Behind Story

얼마 전 종영한 수작 드라마 괴물의 1회 엔딩이었다.

“오~~~~~~~” 가사도 없이 허공에서 뿜어낸 한숨소리가 노래가 됐다.

이 멋진 드라마가 음악을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백호였다.

<괴물>에서는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도 대사로도,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로도 여러 번 등장한다.

현재(2021) 방영 중인 드라마 ‘나비렐라’에서도 최백호의 ‘바다끝’이 많은 이들을 울렸다.

세상은 10년을 돌며 다시 한 번 최백호의 목소리를 찾는다.

나는 10년 전 인터뷰에서 최백호를 만났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고 흘러나온 노래의 주인공인 줄 알았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부쩍 내 인생에서 지분을 잃어가는 ‘낭만’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낭만에 대하여 같은 가사를 쓰는 사람의 삶은 어떨지 궁금했다.

운명이었는지 그가 오랜만에 새 앨범 <길거리에서>를 발표했다.

20년 차이는 젊은 후배들과의 작업이었다.

인터뷰 자리에 나타난 그는 내가 다니는 잡지를 보며 거리 패션 브랜드에 대한 자세한 지식과 관심을 보였다.

<스페이스 공감> 녹화장까지 쫓아 그가 노래하는 걸 난생 처음 봤는데 사람이 몸을 악기로 쓰는 게 바로 저런 거구나 싶었다.

이듬해 그가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것을 봤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이자 기타리스트 박주원이 ‘낭만에 대하여’를 집시 기타로 편곡해 연주했다.

그리고 최백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20대 친구들이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데 최백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는 것이 보였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아래 영상을 꼭 한번 봐주셨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낭만이었다.

그리고 나는 잡지를 옮긴 뒤 최백호를 다시 인터뷰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깊은 울림으로 세상에 위안을 주는 가수가 드물기 때문이었다.

제발 계속해 주세요, 부탁이기도 했다.

쉽지 않은 삶에서 먼저 견디고 지키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것도 없다.

여전히 최백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

우리는 행복하다.

[최백호&박주원 ‘낭만에 대하여’ 서울 재즈 페스티벌 2013]

//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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